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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박열, 광복 후 어떻게 지냈을까?
    영화 이후, 이야기 2020. 10. 9. 03:54

    영화에서 박열은 감옥에 수감되고 아내 후미코는 옥중에서 사망을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박열은 형에게 부탁하여 가네코의 유골을 고향 선산에 안장하게 했다.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가네코는 남편의 고향인 주흘산 자락 팔영리 중턱에 묻혀 있습니다. 해방 이후에도 계속해서 수감되어 있다가 1945년 10월 27일 아키타 형무소에서 22년간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미군에 의해 석방됩니다.  

    박열과 후미코
    1945년 10월 27일, 박열 출옥 환영대회가 열린 오오다테역 광장. 1만5천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박열은 석방 이후 한동안 일본에 머물게 됩니다. 이때 김구 선생님은 1946년 2월 박열에게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올 것을 부탁합니다. 당시 김구 선생님은 그나마 내가 살아있을 때 이일을 해야지 내가 안 하면 아무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여 몹시 중요하게 여겼고 만약에 김구 선생님이 좀 더 살아계셨다면 안중근 의사의 유해도 모셔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효창공원, 삼의사묘 (안중근 의사의 묘는 허묘입니다.) 


    박열은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세 분의 유해를 발굴, 무사히 본국으로 보내드립니다.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고 단장이 되어 1949년 5월 영구 귀국할 때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1947년 재혼을 하여 1남 1녀를 두는 데 아들 박영일은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예비역 장성까지 지냈는데 재일교포 최초로 육사 졸업생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아프리카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박열 왼쪽 두번째


    이때부터 본격적인 반공노선을 걷게 되는데요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지만 너무 지나친 우익 성향을 민단의 반발을 불러 단장직에서 사임을 하고 박열 장학회를 설립 인재양성을 하며 정치적인 활동은 물러나려 했지만,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에 있던 박열은 북한으로 납북됩니다. 이후의 행적은 나와있지 않지만 1974년 1월 북한은 박열의 죽음을 발표합니다.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박열은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되고 후미코는 2018년 독립유공자로 추서 됩니다. 

    북한에서 박열의 행적은 자세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는 조소앙, 엄항섭 등과 함께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에서 활동해 회장을 맡기도 하였는데, 워낙 성격이 불같고 강직해서 북한에 있을 때도 당국에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재밌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요. 1955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식에서 평화위원회 서기장이었던 최성환과 의견 다툼이 있었는데 최성환의 늑골을 부러뜨렸다고 합니다. 김일성이 축하하는 차원에서 만든 연회에서 월북자들이 희희낙락하는 꼴이 보기 싫어 두들겨 팼다는 설이 있는데 북한 생활에 불만은 있지만 김일성의 눈 밖 에날 행동은 하지 않으며 지냈듯 합니다. 박열 영화를 만든 이준익 감독님은 2000년 영화 아나키스트를 제작하면서 박열이라는 인물을 처음 알게 되고 큰 매력을 느껴 영화로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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